2020년 1월 12일 일요일

좋아하는 것에 대해 말하기

2019년 7월에 <앨리바바와 30인의 친구친구- 이미와 아직의 세계>에 글로 참여했다.








영화 <소공녀>(전고운 연출, 2018.)에서 미소는 가사도우미로 일해 하루하루 근근이 먹고 산다. 가난 탓에 미래를 계획하기 어렵다 보니, 시간이 갈수록 미소의 삶은 자꾸만 축소된다. 어느 날 월세가 오르자 미소는 안정적인 주거 대신 위스키와 담배, 애인을 선택한다. 집과 나만의 공간에 애착이 강한 내가, 위스키와 담배, 애인 때문에 이 집 저 집 신세 지는 생활을 선택한 미소를 이해할 수 있는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다. 그렇지만 미소는 나에게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포기하고 싶지 않을 만큼 좋아하는 것이 있냐는 질문을 남겼다.


좋아하는 것을 탐험하기




내가 좋아하는 첫 번째 물건은 ‘지도-확대경-줄자-아이폰 카메라’이다. 이 물건들은 내가 도시, 건물, 공간을 탐험할 때 사용하는 도구이다. 도시, 건물, 공간은 모두 인공물로 우리는 그 안에서 살아간다. 나는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이래로 도시, 건물, 공간을 사랑해왔다.
건축학과에 가고 싶어 대학 입시를 재수했다. 건축학과에 가고 싶었던 이유는 아마도 아빠가 지은 집에서 보낸 유년 시절의 기억 때문이 아닐까 짐작한다. 사실 그럴듯하게 들릴 것 같아 이렇게 설명하길 좋아한다. 건축학과에 진학한 이유는 불명확하지만, 학교에서 배운 건축 교육이 나에게 남긴 영향은 명확하다. 나는 도시, 건물, 공간의 형태를 살피고 그것들이 어떻게 그런 형태에 이르렀는지 탐구하기를 좋아한다.
는 자주 위성 지도로 낯선 도시를 헤맨다. 반듯하게 구획된 도시에서 갑자기 구불구불하게 난 길을 발견하면 즐겁다. 작은 건물들이 오밀조밀 모인 도시에 혼자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우뚝 선 건물을 보며 놀란다. 종이 지도를 볼 때면 어떤 정보 값이 표시되어 있는지를 유심히 본다. 또, 거리뷰로, 버스로, 따릉이(서울시 공유 자전거)로, 걸음으로, 도시를 만난다. 낯선 도시에 가면 그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을 찾는다. 유명한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에 방문하면 건축가의 의도대로 건물이 쓰이고 있는지 관찰한다. 무작정 걷다가 유감스러울 정도로 미감에 맞지 않는 건물을 만나면 신나서 사진을 찍는다. 50년 전에 설치되어 여전히 작동하는 엘리베이터에 타보려고 건물을 방문하기도 한다. 계단을 내려오며 무심코 잡은 난간이 손에 착착 감기면, 그 속이 채워졌는지 비었는지 두드려보고, 폭과 두께는 얼마나 되는지 줄자를 꺼내 치수를 확인하기도 한다. 어둡고 조용해 소리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에 가면 감탄하며 되도록 오래 머무른다. 좁고 긴 복도 끝에 나무가 보이는 창문이 있으면 꼭 끝까지 걸어본다. 이것이 내가 도시, 건물, 공간을 탐험하는 방법이다. 

<최초의 집>




두 번째 물건은 ≪월간 이리 28호≫이다. ‘월간 이리'는 상수동 이리카페에서 만들던 무가지다.(2019년 3월에 발행 중단) 나는 이 잡지에 내가 살았던 열한 채의 집에 대한 이야기를 연재했다. 연재 첫 글인 <최초의 집>이 ≪월간 이리 28호≫에 실렸다. ‘최초의 집’은 2018년 9월에 유어마인드에서 나온 나의 단행본 제목이기도 하다.
종종 어쩌다 책을 쓰게 되었냐는 질문을 듣는다. "원래 글쓰는 걸 좋아했어요"라고 짧게 대답하고 끝낼 때가 있는가 하면, 가끔은 <최초의 집>이 ≪최초의 집≫이 된 이야기를 길게 들려주기도 한다. 최초에는 내가 살았던 첫 번째 집에 대한 글 <최초의 집>을 블로그에 올렸다. 방문자도 댓글도 거의 없던 블로그에 귀인이 나타나 본인이 살았던 첫 번째 집에 대한 글을 써서 보내주었다. ‘누군가 내 글을 읽고 잊었던 기억을 떠올리다니!’ 한껏 고무되어 필자 모집 트윗을 주기적으로 올리던 <월간 이리> 계정에 메일을 보냈다. “저는 아빠가 지은 집에서 태어나 열 번 이사했고, 지금까지 살았던 열한 채의 집에 대한 글을 연재하고 싶습니다.” 열한 달 뒤에 나는 <월간 이리>에 연재한 글을 모아 책 ≪0, 0, 0≫(2015)을 독립출판했다. ≪0, 0, 0≫도 나에게 귀인을 물어다 주었다. 오킬로미터 북스토어, 헬로 인디북스, 유어마인드의 사장님들이 책방 블로그에 ≪0, 0, 0≫의 후기를 올리고, 독립출판물을 소개하는 매체에 책을 추천해주었다. 독자의 후기도 여럿 들었다. ≪0, 0, 0≫을 독립출판하고 일 년 뒤에 유어마인드의 이로 님으로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첫 번째 집을 인터뷰해 책을 써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이 책이 2018년 출판된 ≪최초의 집≫이다.
<최초의 집>이 ≪최초의 집≫이 되기까지 단계마다 영향을 미친 우연과 선의와 행운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최초의 집>을 쓰지 않았다면, 귀인이 블로그를 보고 자신의 첫 번째 집 이야기를 보내주지 않았다면, 월간이리에 연재할 수 있을지 용기내 메일을 보내지 않았다면, ≪0,0,0≫을 독립출판하지 않았다면, 아마 ≪최초의 집≫도 없을 것 같다. 

몸과 화해하기




세 번째 물건은 스윙화다. 스윙화는 내가 스윙댄스, 특히 솔로재즈 수업을 들을 때 신는 신발이다. 스윙댄스는 스윙재즈 음악에 맞춰 커플로, 또는 혼자서 추는 춤이다. 내가 스윙댄스를 춘 지는 3년 6개월이 되었다.
스윙댄스를 추기 전에 나는 스스로를 몸치라고 생각했다. 몸을 쓰는 활동을 할 때마다 지나치게 남의 시선을 의식했고 어색해 했다. 락 페스티벌이나 스탠딩 콘서트에서 점프하며 팔을 흔들 때조차 혼자만 박자가 어긋나는 것 같아 음악에 집중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몸은 껍데기일 뿐, 몸 안에서 내 몸을 거추장스럽게 여기는 나의 정신만이 ‘진짜 나’라고 여겼다. 나는 스윙댄스를 배우며 몸과 화해하는 중이다. 
음악을 몸으로 표현하는 일은 근사하다. 음악의 분위기에 맞춰 몸의 움직임을 부드럽거나 신나게, 가볍거나 힘차게 바꿔보기도 하고, 멜로디, 리듬 등의 요소에 어울리는 동작으로 음악을 표현하기도 한다. 여러 악기 중 한 악기에 집중할 수도 있고 음악의 전체 구성을 파악해 구조에 맞는 춤을 추기도 한다. 사람마다 음악을 다르게 듣고 다르게 표현하기 때문에 한 음악이라도 모두가 다른 춤을 춘다. 같은 곡에도 매번 다르게 춤을 출 수 있다는 점이야말로 스윙댄스의 큰 매력이다. 


함께 운동하기




마지막 물건은 농구공이다. 2019년 3월, 농구게임 내기에서 친구에게 진 이후로, 점심시간마다 회사 근처 볼링장에 있는 농구게임기를 찾았다. 매일 농구게임을 하다 보니 ‘진짜 농구’를 배우고 싶어졌다. 성인 여성이 농구를 배울 수 있는 곳을 찾아 헤매다가 트위터에서 ‘위캔즈 농구단’을 소개받았다. 위캔즈 농구단은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퀴어프렌들리 페미니스트 아마츄어 농구단이다. 나는 이곳에서 지난 4월부터 농구를 배우기 시작했다.
학창 시절 체육 시간을 떠올리면 열심히 운동하는 여자아이가 비웃음을 사던 기억만 있다. 이를 악물고 달리기라도 하면 누군가 꼭 “아이고! 국가대표 나셨어.”하고 비아냥거리며 킥킥댔다. 운동장은 남자아이들에게 내어주고 스탠드에 앉아 적당히 운동에 관심 없는 척, 지루한 체육 시간이 얼른 지나가 버리길 바라는 척 하다 보니, 나는 어느새 운동 못 하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단체 운동은 질색이었다. 어른이 되어 내가 시도한 운동은 대부분 혼자서 하는 운동-수영, 필라테스, 요가 등-이었다.
위캔즈 농구단의 수업을 듣는 사람들은 열심히, 최선을 다해 뛴다. 아무도 열심히 하는 사람을 비웃지 않는다. 서로를 응원한다. 아무도 비웃지 않을 때, 서로서로 응원할 때, 함께 운동하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많은 여성이 경험하면 좋겠다. 우리는 단지 함께 운동해 본 적이 없을 뿐이다. 
지난 주에는 회사 일로 바빠 삼 주 만에 농구 수업에 갔다. 수업이 끝나고 땀에 절어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갑작스레 눈물을 쏟았다. 여자들끼리 있을 때의 안전한 느낌이 너무 좋았다.


좋아하는 물건


재영 씨가 좋아하는 물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을 때, 곰곰 생각해도 ‘이건 절대 못 버려, 대체할 수 없어’하는 물건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아 애를 좀 먹었다. 나는 살면서 열한 번 이사 했고 일 년에서 사 년에 한 번씩 집을 옮기며 살아왔기 때문에, 집에 수납공간이 넉넉하게 있는 사람, 자주 이사하지 않는 사람과 물건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다를 것 같다. ‘이제는 사용하지 않지만, 추억이 있으니까’ 같은 이유로 쓰지 않는 물건을 보관하는 일이 거의 없다. 쓸모를 다한 물건을 그때그때 정리하고, 불필요한 짐을 늘리지 않으려 항상 노력한다. 물건에 애착을 갖는 일이 잘 없다. 다행히 좋아하는 것은 몇 가지 있어서 그걸 상징하는 물건을 소개해 봤다. 역시 좋아하는 것을 떠올리는 일은, 그것에 대해 말하는 일은 즐겁다.



신지혜

아빠가 지은 집에서 태어나 지금은 열두 번째 집에서 살고 있다. 이태원에서 6년째 살며 맛집은 몰라도 좋아하는 골목은 몇 개 생겼다. 건축과 책, 춤을 좋아한다. 




*앨리바바 편집 전의 글을 조금 다듬었습니다.





2019년 11월 7일 목요일

합정 <서양미술사>


<서양미술사>가 내부 공사를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몹시 서운했다. 집에 오는 길에 서운함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 핸드폰 화면을 한참 바라보았다. 전화를 걸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2018 4 13 밤에 산책하다가 서양미술사를 처음 발견했다. 아직 이전 가게의 간판(파크부동산) 달려 있었고, 커피부터 시작하겠습니다라고 쓰인 종이가 붙어 있었다. 글씨체가 마음에 들었다. 어느 겨울,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 덜덜 떨며 가게에 들어 온 내게 사장님은 주문도 받기 전에 따뜻한 잔을 내어주셨다. 손에 잡히던, 손바닥으로 전해지던 따뜻한 마음을 기억한다.  퇴사한 날 회사에서 나온 11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무작정 합정역으로 향했. 서양미술사에서 나폴리탄 스파게티에 맥주 병을 마시고 취해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먹은 나폴리탄 스파게티가 나의 유일한 나폴리탄 스파게티이자 최고의 나폴리탄 스파게티다.  우유 거품이 가득 올라간 아란치노 잔을 양손으로 사장님을 보고 크게 웃었던 날을 기억한다. 왜 그렇게 웃음이 났는지 모르겠지만, 좀처럼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내게 사장님은 "지혜 님이 이렇게 밝은 분인 줄 몰랐다"고 말했다. 다음에 갔을  아란치노를 주문해 봤. 오렌지청이 들어간 커피와 부드러운 우유 거품이 꼬인 머릿속을 쾌청하게 만드는 맛이었다. 나는 그후로도 아란치노 잔만 보면 웃음이 났다. 옆자리 손님이 친구에게 여기는 핸드드립이 유명해”라고 하는 말을 듣고, 다음에 갔을 핸드드립 커피를 주문했. 커피에 쓴 맛이 전혀 없을 있다는 알게 됐다.  커피를 마시고 심장이 두근두근했던 날을 기억한다. 포개진 컵을 설거짓거리인 오해하고 사장님을 놀렸던 날을, 맥주를 얻어 마신 날을, 아무도 없는 가게에서 생각의 여름의 <다섯 여름이 지나고> 틀어 두고 깜빡 졸았던 날을 기억한다. 
기억할 거니까. 괜찮다.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기억이 쌓일 테니까. 그건 또 얼마나 좋을까. 



<서양미술사>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mi_sul_sa/






















































2019년 10월 15일 화요일





손을 유심히 보던 사람이 있었다. 재주 많은 손이라며, 만날 때마다 손을 꼼꼼히 오래 들여다봤다. 손이 세상에서 제일 귀한 무엇인 듯이, 마치 손에서 나의 모든 세계를 들여다보듯이. 나는 뼈와 핏줄이 불거진 크고 투박한 손이 창피해서 간지럽다며 서둘러 손을 그에게서 빼내고는 했다. 

<벌새>에서 영지 선생님이 은희에게 자신이 싫어질 , 손가락을 보라고, 그리고 손가락, 손가락 움직여 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나는 사람 생각을 잠깐 했다. 

사람도 가끔 어떤 손을 보면 나를 떠올릴까. 아니면 어딘가에서 다른 누군가의 손을 탐구하고 있을까. 어느 쪽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나는 이전보다 나의 크고 투박한 손을 좋아하게 되었다. 누군가 찬찬히 오래 보아주던 . 사람은 "상처가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만 성장한다.”*





*최은영, <그때의 은희들에게>, 《벌새》, 아르테 2019.

2019년 10월 3일 목요일

가족사진






가장 좋아하는 가족사진이다. 책상맡, 책 읽다 고개 들면 눈길 닿는 곳에 두었다. 공부방에 있는 유일한 사진이자 상자에서 꺼내 둔 유일한 가족사진이기도 하다.


84년도 어딘가의 해변이다. 모래에 비스듬히 꽂힌 파라솔 아래에 돗자리를 깔고 자리를 잡은 엄마와 아빠, 언니가 보인다. 사진 속의 엄마와 아빠는 나보다 5살, 8살 어리다. 그들은 무언가를 막 먹으려는 듯 모여 앉아 있다. 세 사람 모두 수영복을 입었고 아빠와 엄마는 밀짚모자를 썼다. 돗자리 왼쪽 모퉁이에 놓인 모자가 언니의 것이라기엔 커 보인다. 아마 이 사진을 찍어 준 사람의 것일지 모르겠다. 그가 누구인지 전혀 짐작 가지 않는다.  언니가 입은 수영복은 내가 나중에 물려 입기도 했다. 저 수영복을 입은 나의 사진이 이 집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것이다. 엄마는 2010년 두 번째 결혼을 할 때 가족사진을 모두 나에게 주었다.

나는 자주 이 사진을 들여다 보며 사진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내가 있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2019년 7월 30일 화요일

할머니

화요일마다 가는 카페 사장님이 여름 휴가를 가셨다. "할머니 댁에서 잠을 실컷 자다가 올 생각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좋겠다. 할머니가 있어서.


나는 할머니가 참 좋았다. 우리 가족은 명절이나 집안 행사가 있을 때면 아빠가 몰던 파란색 트럭을 타고 할머니댁에 갔다. 운전석에 아빠가 앉고 그 옆에 엄마 언니 내가 차례로 앉았다. 내가 가장 문 쪽에 앉았기 때문에, 할머니댁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차에서 뛰어내렸다. 끼기긱 소리가 나는 나무 대문을 밀치고 마당으로 달려 들어가며 "할머니이-"하고 소리쳤다. 할머니는 "응- 왔어? 꽃비는?"하고 물었다. 할머니의 눈은 작은 나의 정수리 너머 를 향해 있었다. 언니가 뒤따라 마당으로 들어오면 할머니는 '꽃비 먹으라고' 찐 옥수수와 '꽃비 먹으라고' 담근 식혜를 마루로 내왔다.

할머니에게 언니는 각별했다. 언니가 네다섯 살 때쯤 엄마 아빠와 떨어져 할머니댁에서 지낸 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언니가 마루에 걸터 앉아 할머니 옆에서 옥수수와 식혜를 먹는 사이, 나는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가 선풍기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선풍기 머리에 대고 "아아아아아아아"하고 소리를 내면, 선풍기가 "아아아아아아아"하고 대답했다. 할머니는 매번 꽃비를 찾았고, 매번 꽃비가 좋아하는 음식을 해두었고, 매번 꽃비의 졸업과 입학만 챙겼다. 요즘도 나는 옥수수나 식혜를 보면 할머니 생각이 난다.

나는 여전히 할머니가 참 좋았다.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부모님은 이 년 정도 할머니를 우리집에 모셨다. 입시 준비로 언니가 바쁜 덕분에 나는 할머니를 독차지할 수 있었다. 할머니는 밭일로, 논일로 그렇게 고생을 많이 했는데도 살결이 보드랍고 포근했다. 포근한 할머니에게 안기는 게 좋았다. 당뇨 때문에 퉁퉁 부은 할머니 손을 잡고 산책하는 게 좋았다.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모들 어릴적 이야기가 좋았다. 병원에 갈 때마다 병원 매점에서 사다주는 인절미가 좋았다. 당뇨 때문에 식단 조절을 해야 하는 할머니가 인절미를 하나 더 먹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도 좋았다. 엄마 몰래 할머니와 간식을 나눠먹는 게 좋았다. 할머니와 나 둘만 아는 비밀이 좋았다.


할머니댁에 가서 잠을 실컷 자다 올 수 있다면 좋겠다. 할머니 무릎을 베고 마루에 누워서 "할머니 나 어릴 때 왜 맨날 언니가 좋아하는 옥수수랑 식혜만 해줬어?" "내가 옥수수랑 식혜에 손도 안 대는 거 알았어?" 그렇게 응석도 부리고 싶다. 할머니댁에는 지금 누군가 남이 산다더라. 좋겠다. 할머니가 있어서.









2019년 3월 15일 금요일

장류진의 단편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

이 작품은 제21회 창비 신인 소설상을 받았다. A4 12장 분량의 소설이 창비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다.
https://magazine.changbi.com/q_posts/%EC%9D%BC%EC%9D%98-%EA%B8%B0%EC%81%A8%EA%B3%BC-%EC%8A%AC%ED%94%94/?board_id=2659
주인공 김안나 씨는 중고 물품 거래 앱 <우동마켓>을 만드는 판교테크노밸리 스타트업 회사의 기획자다. 대표 데이빗(본명 박대식)의 지시로, 김안나 씨는 점심시간에 <우동마켓>에 매일 백 개씩 글을 올리는 의문의 사용자 '거북이알'을 만나 정체를 밝힌다. 거북이알을 만나는 사건 외에도 소설에는 오전 아홉 시부터 오후 아홉 시까지 김안나 씨가 회사에서 보내는 평범하고 이상한 12시간이 담겼다. "일의 기쁨"은 하찮고 "일의 슬픔"은 뼈아프다.
모든 회사에는 이상한 구석이 있기 마련이니까 직장인이라면 공감하며 재미있게 읽을 것 같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안 해야 돼요. 그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머리가 이상해져요.”
+ 그나저나 소설에 나오는 길 건너로 이어지지 않고 올라갔다 내려오는 육교가 판교에 진짜로 있구나! 보러 가고 싶다.

2019년 2월 25일 월요일

안도

낯선 동네로 이사온 지 6년이 지났다.
6년 동안 동네에서 동네로 한 번 이사했다.
지하철역에서 멀어진 대신 집이 넓어졌다.
동네 구석구석 열심히 걸어다닌 덕분에
맛집은 몰라도 좋아하는 골목은 몇 개 생겼다.


오늘은 퇴근길에 부러 돌아 헬카페에 들러 커피를 샀다.
내가 이태원으로 이사한 2013년 4월에 헬카페도 갓 문을 열었다.
헬카페가 입소문을 타고 확장하고 점점 더 유명해지는 동안
동네에는 많은 가게가 생기고 없어졌다.


카푸치노를 주문하고 기다리며
Shazam으로 카페에서 나오는 음악을 검색해
아이튠즈 보관함에 추가했다.
커피를 받아들고 가게를 나섰다.
가게 앞에서 뚜껑을 열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방금 아이튠즈 보관함에 추가한 앨범을 들으며
지름길로 집에 돌아왔다.